노강서원 (장암동 산 146-1번지)
노강서원은 조선조 숙종 때의 문신 문열공 박태보를 모신 사당이다.
박태보는 1654년에 서계 박세당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4세 때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680년 홍문관 교리를 거쳐 이조좌랑, 암행어사, 파주목사 등을 지냈다.
그러다가 1689년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80여명의 유림들이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때 박태보가 앞장서 상소문을 작성하게 된다.
이상소문을 받아든 숙종은 노여움을 이기지 못하고 박태보를 잡아 들여 꾸짖자 박태보는 눈물을 흘리며 아뢴다.
“신이 전하의 실덕(失德)을 개탄하여 신하된 도리로서 붓을 들었습니다.”
이에 숙종이 분함을 참지 못하고 “감히 인현왕후와 부화뇌동하여 과인에 망설을하다니···”
“전하의 잘못을 신하된 도리로서 간했다 하여 어찌 망설이라 하시옵니까? 신은 다만 전하의 잘못을 깨우쳐 드리려 할 뿐이옵니다.”
아무리 얼러 봐도 박태보의 입에서 귀에 거슬리는 말만 나오자 숙종은 당장 극형에 처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곤장을 수없이 맞고, 살을 인두로 지져대도 박태보는 형리들에게 인두를 더 달구어 지지라고 호통을 쳤다.
그제서야 숙종도 그가 끝내 굽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하는 수 없이 진도로 귀양 보내기로 했다.
전라도 진도로 귀향살이를 가던 도중 박태보는 노량진에서 매맞은 상처가 덧나 독으로 죽으니 그때 나이 36세였다.
박태보는 학문과 문장에 능통하고 글씨도 뛰어나게 잘 썼다.
그 후 5년이 지나 장희빈의 간악함이 만천하에 들어나자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그때 죄인으로 몰렸던 사람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이에 박태보는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열공(文烈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노강서원은 원래 노량진에 있었다가, 1695년에 건립되었다.
그 후 6.25동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69년 그의 후손들에 의해 이곳 장재울에 노강서원을 옮겨 세우고 1977년에 경기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