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주년을 맞이하여) 고병호 의정부신문·방송협의회장 바람을 가르고 말을 달리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달려온 세월이 어느덧 3년이 흘렀습니다. 멋모르고 애향심하나로 달려들어 깨지고 터지고 고난을 겪으면서 가꿔온 ‘지역의 대표언론’. 참 힘들었지만 보람도 많았습니다. 조용히 3주년을 맞은 의정부신문·방송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역의 참된 언론을 만들자는 신념으로 지켜 봐주시고 도와주시는 협의회 고문님들, 이사님들 및 많은 회원님들께 큰절을 올리는 것으로 감사한 마음을 표하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묵묵히 걷는 저희의 길을 지켜봐주시는 시민여러분들께 또한 감사드립니다. 좋은 소식이던 나쁜 소식이던 저희 소속기자들이 현장을 누비면서 취재 할 때 다소 업무적 상황과 의견의 차이 때문에 팽팽한 긴장감을 지니는 경우도 있지만 취재에 협조해 주신 기관단체, 공직에 계신 분들께도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모두가 입장의 차이는 있겠지만 ‘잘사는 의정부, 선진도시로 도약하는 의정부시’를 만들자고 노력하는 공동체적 인적 구성원들로써 각자의 맡은바 삶과 의무에 충실하며 우리의 후손들과 후예들에게 ‘겸손한 당당함’으로 우리
의정부신문방송에서는 신속한 현장 출동으로 현장감이 담겨있는 동영상을 MBC에 제공, 전국방송에 신속보도를 제공함으로써 공영성과 신속성을 추구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아래의 아이콘을 클릭하시면 의정부신문 방송이 제공했던 뉴스를 MBC 홈페이지를 통해 시청하실수 있습니다.7월 25일 의정부경전철 전복사고 관련 26일 MBC 오전 뉴스투데이 방송화면8월 10일 의정부신곡동 백병원앞 유조차 전복사고 관련 11일 오전 뉴스투데이 방송화면앞으로도 많은 활동과 신속성을 기하는 의정부신문 방송이 될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정부라는 지명은 언제부터 어떻게 유래된 것일까? 조선 3대 태종이 왕자 시절에 이복 동생인 방번(芳番)과 방석(芳碩)을 살해하고 소란을 일으키자 태조 이성계는 불충불의한 자와 함께 살 수 없다고 하여 함흥으로 옮겼다. 이후 태종은 여러 차례 사자(使者)를 보내어 용서를 빌었으나 태조는 사자(使者)를 감금, 살해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함흥의 사’ 또는 함흥차라는 말이 이때부터 생겨났다고 전한다. 이후 태조가 화가 누그러지는 듯해서 태종 2년(1402) 12월에 지금의 의정부까지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태종은 부왕을 맞을 연회를 베풀기 위해 천막을 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한편 중신 하륜(河崙)은 부왕 태조가 반드시 태종을 해칠 것이라고 예상하고 천막에 큰 기둥을 많이 세우게 했다. 태조는 활의 명수(名手)이기 때문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 였다. 예상대로 태종은 순간적으로 기둥 뒤에 몸을 피해서 다행히 부왕의 화살을 맞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곧 연회가 시작되자 태종은 ‘헌수(獻壽)’의 뜻으로 친히 부왕 태조에게 잔을 올려야만 한다. 그러나 이 또한 하륜의 지략으로 하
경민대학 교수 김남일 이명박 대통령은 금년 3월 17일 제1차 국가브랜드 보고회에서 ‘국가 상승’을 강조한 이후 지난 7월 22일 제2차 국가브랜드위원회 보고대회를 주재 ‘코리아 브랜드’를 끌어올리기 위하여 아이디어를 수렴했다고 한다. 지난 1차 회의때 ‘경제적 위치에 걸맞는 국가브랜드 가치를 갖고 있지 못해 문제’ 라며 “1인당 국내 총생산(GDP)이 3만∼4만 달러가 되더라도 다른 나라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국민, 국가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고 했다. 국가 브랜드 가치란 한 국가 내의 모든 국민들이 생산해 내는 가치의 총 합산을 의미 한다. 국가 브랜드 지수는 국민이나 기업 등 민간의 활동으로 향상시킬 수도 있고, 국가의 홍보와 관리 등으로 인하여도 향상될 수 있다. 국가 브랜드 이미지는 한 국가의 경제적 성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현대에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브랜드/이미지 마케팅은 여러 기업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2008년 50개국을 대상으로 안 홀트 도시브랜드지수조사-GMI가 발표한 국가브랜드 자료를 살펴보면 국가의 국민, 통치, 수출, 관광, 문화와 유산, 투자와 이민이라는
의정부시 가능3동 산 82번지는 선조의 여섯째 딸 정휘옹주와 그 남편 전창군 유정량의 묘가 있었는데 1979년 그의 후손들에 의해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로 이장됐다. 유정량은 영의정 유영경의 손자로 14세에 정휘옹주에게 장가들어 부마가 되고 전창위에 봉해졌다. 그는 성품이 활달하고 무인 다운데가 있어 말타기를 즐겨했으며 장군이 되기를 원했으나 부마라는 신분 때문에 관직에 오를 수 없음을 불만스럽게 여긴 나머지 옹주에게 퉁명스럽게 대할때가 여러번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무렵 우리나라에 담배가 처음 들어와 남녀 구분 없이 장죽으로 담배 피우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하자 옹주도 장죽을 물고 다녀 남편이 보기에 지나치고 눈에 거슬려 몹시 나무랐는데 그게 화근이 되어 부부싸움까지 번졌다. 화가 난 옹주는 대궐로 들어가 분함을 실토하자 선조께서 부마를 불러들였다. 유정량은 괴나리 봇짐을 메고 짚신 두 죽을 양허리에 찬 채 궁중으로 들어갔다. 그 차림새가 버릇없는 것 같으면서도 기인다운 데가 있어 선조께서 손 행색으로 궁중에 들어선 까닭을 물으셨다. 그러자 유정량이 아뢰기를 “신은 이미 상감의 노여움을 산 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