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에서 동부간선도로를 따라 서울쪽으로 가다보면 7호선 종점인 장암역이 보이는데 그 맞은편 아치형에 노강서원과 석림사 안내판이 보인다.여기에서 석림사 계곡을 끼고 등산로를 따라 쭉 오르다 보면 윈편으로 서계(西溪) 박세당 선생의 고택이 있고 십여분을 오르다보면 노강서원을 지나서 석림사 일주문이 보인다.이곳에서 포장된 길을 따라 300m 정도 오르면 경내에 이르게 된다.석림사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수락산의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계곡부의 하단부로 계곡의 북쪽 경사면(해발 140m)에 접하여 동서방향으로 길게 석축을 조성하여 대지를 마련하였다.사찰의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봉선사본말사약지’에는 조선시대에 박세당이 매월당 김시습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창건하였다고 하며 또한 경기도 불적자료집에서는 조선 현종 12년 (1671) 석현화
이 성당은 본래 경기도 양주시 회천면 덕정리 역전에 위치해 있던 ‘덕정리 본당’을 1945년 해방 후 의정부로 옮겨와 ‘의정부 본당’으로 변경하면서 시작되었다.당시 덕정리 본당에 부임했던 김피득(베드로, 1907~1954)신부는 덕정리로부터 남쪽으로 12km떨어진 곳에 위치한 경기도 양주시 의정부시가 교통의 중심지라서 발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예견하고 본당 이전을 추진하였다.그리하여 덕정초등학교 자리에 위치해 있던 덕정리 성당을 매각하고 의정부리에 1,625평의 대지와 25평 규모의 기와 한옥1동을 매입하여 수리한 후 임시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하였다. 이 때 신자 수는 6~7세대 30여명에 불과하였다.‘의정부 본당’ 시대가 열린지 5년 남짓한 뒤에 벌어진 6.25 한국전쟁은 성당에 큰 상처를 남겼다.특히 의정부가 격전지였던 탓에 시가지가 완전히 폐허로 변했�
소재지는 장암동 산 146-1번지로 전철 장암역의 맞은편에 위치한 입구 표시판을 따라 올라가면 길옆에 위치한다.노강서원은 조선조 숙종 때의 문신 박태보를 기리기 위한 사당 형식의 간략한 서원이다.노강서원은 원래 노량진에 있었고 1695년에 건립되었다.원래 노강서원 자리엔 현재 사육신묘가 조성되어 있다. 일제시대인 1925년 큰 홍수로 한강물이 넘쳐흐르는 바람에 노강서원이 유실되었다.그 후 1969년 그의 후손들에 의하여 이곳에 새로 노강서원을 건립하였다.현재는 완전한 형식의 서원은 아니지만 서당과 동/서재, 외삼문으로 되어 있다.동/서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평면구조로서 전면 반 칸은 툇마루로 이루어져 중앙 마당을 향하여 서로 마주하여 배치를 이루고 있다.위패를 모신 사당의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양측에는 풍판이 설치되어 있다.서원이란 조선�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도를 닦던 곳이라 해서 원효대사의 동상을 모시고 절 이름도 원효사라 불린다.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의정부 일대가 격전지였던 관계로 건물들은 모두 소실되었다.절이 다시 개창된 것은 1954년 비구니 우일(又一)이 석굴을 발견하고 수도하던 중에 1956년 목조 기와지붕모니불과 문수/지장보살의 삼존불상을 봉안하였다.그리고 1966년에 그로 인해 여기저기 소실되어서 지금은 조금씩 복원하고 있는 중이다.원효사를 답사하려면 1호선 전철 망원사역에서 하차하여 신흥대학 옆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북한산 국립공원 관리공단 안내소가 보인다.계속 올라가면 주차장 안내지도와 도봉산 포대능선 아래 가장 높은 곳 왼쪽에는 망월사, 오른쪽에는 원효사가 표시되어 있다.이곳을 지나 계속가면 안내팻말이 보이는데 왼편 화살표는 망월사, 직진화살표
함태영 선생(1873~1964)은 근대 한국이 낳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종교인이다. 함경도 무산 출생으로 대한제국 시절에 법관 양성소를 나와 함성재판소 검사때인 광무 2년 (1898)에 이상재 등 독립협회의 회원들을 무죄로 석방했다가 파면당했으며, 그후 대심원, 복심법원의 판사를 역임했다.3.1독립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가 체포돼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목사가 되었다.해방후에는 1949년 제2대 심계원장, 이어 한국신학대학장, 1952년 제 3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단장이 수여되었으며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묘의 하단은 20개의 판석으로 병석을 둘렀으며 전후면 중앙에는 각기 무궁화와 십자가를 조각했다.묘앞에 놓인 상석 이외의 다른 석물은 없고 봉분은 높이 2m, 둘레는 17.4m이다.
정빈 민씨는 선조의 후궁이며 인성군의 생모로서 명종 22년 (1567)에 출생했다.14세에 간택 입궁하여 빈위에 올랐으며 특히 예절과 덕행이 뛰어나 선조도 갓을 쓰지 않고는 민씨를 대할 수 없었다고 한다.60세에 하세했는데 소생으로는 인성군 공, 인흥군 영과 정인, 정선, 정근 옹주 등 2남 3녀를 두었다.분묘주위에는 곡장을 두르고 묘 하단에는 호석을 설치했으며 묘 앞 중앙부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대가 놓여있고,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묘비는 뒷면에 새긴 ‘숭정기원 무진후 오십이년기미’의 기록으로 보아 숙종 5년 (1679)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정빈민씨 묘 주변에는 민씨의 아들 인성군을 비롯 손자 해원군 등의 묘가 같이 있다.
화릉군은 인성군 공의 셋째 아들인 해원군의 여섯째 아들로 현종 원년 (1660)에 출생하여 영조 9년(1733) 74세의 일기로 하세했다.작위는 현록대부이며 도총부 도사를 역임했고 효자 정문을 받았다.분묘는 화릉군과 부인 안동 김씨의 묘가 나란히 있으며 묘 둘레는 낮은 호석을 둘렀고 쌍분 앞 중앙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대를 배치했다.묘비가 꽃힌 대석은 장방형으로 연화문을 장식했고 비석 뒷면에 음각된 ‘황명숭정기원후 재갑인오월일’의 기록으로 보아 묘비는 화릉군이 하세한 다음해인 영조 10년(1734)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인성군 이공은 선조의 일곱째 아들로 호는 백인당이고 어머니는 정빈 민씨이다.선조 32년(1599) 인성군에 봉해지고 사옹원 종부시의 도제조와 종친부에 재직하면서 관기를 확립했고, 광해군때 인목대비의 폐위를 주장했다.이로 인하여 인조 원년 (1632) 인조반정때 이귀등에 의해 처벌이 논의 되었으나 왕이 허락지 않아 무사했다.이듬해 그는 이괄의 난 때 적당 가담의 죄로 한때 유배되었고 인조 6년(1628) 유효립이 대북의 잔당을 규합, 모반을 기도할 때 왕으로 추대되었다 하여 진도에 유배, 곧 자살을 강요받았다. 인조 15년 (1637)에 복관되었고 시호는 효민이다.부인 해평윤씨와 합장된 이묘의 직경은 4.9m, 높이는 2.5m이다.
경명군은 조선 성종의 열째 아들로 숙의 홍씨의 소생이며, 자는 심이고 시호는 정민공이다.조정에서는 경명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 하고 연산군 생모는 연산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 할 때 경명군은 이를 마다하고 공주 마곡사로 내려가 스스로 약을 먹고 죽었다고 전해온다.묘 앞에 이수가 장식된 묘비와 상석, 향로대가 있고 좌우로 망주석과 문인석을 배치하였다.묘비의 높이는 128cm, 폭 53cm, 두께가 18cm이다.비의 건립연대가 기록돼 있지 않아 확실히 알수 없으나 묘비 후면의 기록으로 보아 1527년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
신항은 성종 8년(1477) 7월 17일 예조참판 신종호의 장남으로 태어나니 보한재 신숙주의 증손이며 어머니는 세종대왕의 3남 의창군의 딸이다.어려서부터 총명하여 7~8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특히 시를 좋아해 황산곡시집을 한자도 틀리지 않고 줄줄 외웠다고 한다.14세 되던 해 여름, 성종의 장녀 혜숙옹주와 결혼하여 순의대부, 고원위에 봉해졌다.신항은 임금의 사위로서 뿐만아니라 시작에 뛰어나므로 성종의 은총을 많이 받았다. 그의 종숙인 신용개가 지은 신도비명에 보면 성종께서 어전에 자주 불러 그의 시를 애송하였으며 밤 늦도록 담소를 나누는가 하면 어의까지 하사한 일이 있었다.연산 8년(1502)봄에 장례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귀후서제조가 되면서 언제나 궁핍한 사람을 우선하여 관곽을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다고 한다.그해 가을에는 혜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