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 유례-장암동,신곡동*수락산 기슭에 서계선생 유적과 김시습의 발자취가 남은 곳.. 장암동장암동은 원래 둔야면 장자리, 오암리, 동막리를 1914년 시둔면 장암리로 고쳤다가 1964년 장암동이 됐다. 수락산 기슭에 조선시대 실학자 서계 박세당 선생과 충신 박태보 선생의 유적이 있으며 행락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장재울 : 수락산 기슭에 있는 마을로서 조선 숙종 때 서계 박세당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서계 선생은 학자로서 명성이 높았을 뿐 아니라 성품이 강직한 반면 너그러워 그를 존경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신 분 즉, ‘관후장자’가 사는 동네라 하여 장자(長者)동이 되었는데 지금은 변음되어 장재울이라 부른다.동막골 : 수락산 아래 있는 마을로서 옛날에 이곳에 음식을 파는 주막이 있�
동의 유례-의정부동,호원동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과 동(洞) 이름은 언제 어떻게 생겼을까?우리마을 이름과 동명의 유래를 살펴 보자첫 번째 의정부동원래는 둔야면 의정부리와 파발막리였으나, 1914년 전국 행정구역을 폐치분합 할때 시둔면 의정부리가 됐다.의정부 1동은 제일시장을 비롯한 큰 시장이 산재해 있고 유흥업소가 밀집돼 있는 상업 중심지역일 뿐아니라 금융기관과 각급단체가 자리하고 있어 시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다.의정부 교육청과 중앙 초등학교, 양주군청이 자리잡고 있던 의정부 4동도 지난 98년에 의정부 1동으로 통합됐다.의정부2동에는 군사시설이 있어 도시발전이 침체를 면치 못하다가 신시가지 개발과 함께 본격적인 개발이 이뤄졌고, 의정부시청과 경기도 제2청사 등 각급 기관이 들어서면서 눈부신 발전이 기대되는 곳으로 부각되고 있다.의정
의정부시의 역사◐ 고구려 때 ‘물 고을’을 뜻하는 ‘매성현’◐ 통일신라때는 ‘내소군’, 고려때엔 ‘견주’로 불려◐ 조선 태종때엔 양주도호부◐ 1963년 1월1일 의정부시로 승격의정부시는 고조선 시대에는 진(辰), 삼한 시대에는 진한(辰韓)땅에 딸려 있었다고 하나 그 경계가 분명치 않아 확실히 할 수 없다. 다만 고구려 때에 매성현(賣省縣)에 딸려 있었는데, 일명 창화현이라고도 불리었다는 기록이 전한다.매성현의 매(賣)는 물(水)의 옛말인 ‘매’를 음차한 것이고, 성(省)은 [시옷‘ㅅ’]의 촉음자이며, 현(縣)은 ‘고을’을 뜻하므로 결국 ‘물 고을’의 뜻이다.통일신라 시대에는 내소군(來蘇)이라 부르다가, 고려 태조 왕건 때에는 견주(見州), 현종 9년 (1018)에는 양주(楊州), 충렬왕 34년(1308)에는 한양부(漢陽府)로 이름이 변천 돼 왔다.조선 태종13년(1413)에 양�
선인들의 일화-정휘옹주와 유정량오늘의 우리가 있기 까지는 과거 수천년 전부터 이 땅에서 살아 온 우리들의 선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선인들의 삶을 통해 삶의 예지와 숨결을 느껴보자. 그리고 과거에 비춰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삶을 반추해 보는 계기로 삼아도 좋을 성 싶다.정휘옹주와 유정량의정부시 가능3동 산 82번지는 선조의 여섯 번째 딸 정휘옹주와 그 남편 전창군 유정량 의 묘 가 있었는데, 1979년 그의 후손들에 의해 남양주군 별내면 덕송리로 이장됐다.유정량은 영의정 유영경의 손자로 14세에 정휘옹주에게 장가들어 부마가 되고 전창위에 봉해졌다.그는 성품이 활달하고 무인다운데가 있어 말타기를 즐겨했으며 장군이 되기를 원했으나 부마라는 신분 때문에 관직에 오를 수 없음을 불만스럽게 여긴 나머지 옹주에게 퉁명스럽게 대할때가 여러번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