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월사(호원동 산 91번지)망월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에 해호스님이 여왕의 명을 받아 창건한 것으로 신라의 서울 월성을 바라보면서 왕실의 융성을 빌었다하여 망월사가 됐다고 한다.이곳은 예로부터 대선사들이 많이 거쳐 갔는데, 고려시대의 혜거, 영소대사와 조선시대의 천봉, 영월, 도암 등 많은 명승들이 배출됐으며, 근래의 도인이라 불리우는 만공, 한암, 성월 스님 등이 지내던 곳이다,망월사는 의정부에서 제일 오래된 사찰로서 지금으로부터 1350여년 전 처음 개창하였다가 그후 여러 번 보수를 거듭해 오다가 1691년에 설명스님이 열입곱번째로 중창하였다. 그 뒤 1839년부터 무려 21년 동안에 걸쳐 영월스님이 새로 중수함으로써 비로서 사찰 규모가 크게 일신됐다.망월사의 옛 기록으로는 천봉대선사탑비문, 신수망월사기선실설법루기가 전해지고 있고 금석물
노강서원 (장암동 산 146-1번지)노강서원은 조선조 숙종 때의 문신 문열공 박태보를 모신 사당이다.박태보는 1654년에 서계 박세당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4세 때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680년 홍문관 교리를 거쳐 이조좌랑, 암행어사, 파주목사 등을 지냈다.그러다가 1689년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80여명의 유림들이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때 박태보가 앞장서 상소문을 작성하게 된다. 이상소문을 받아든 숙종은 노여움을 이기지 못하고 박태보를 잡아 들여 꾸짖자 박태보는 눈물을 흘리며 아뢴다.“신이 전하의 실덕(失德)을 개탄하여 신하된 도리로서 붓을 들었습니다.”이에 숙종이 분함을 참지 못하고 “감히 인현왕후와 부화뇌동하여 과인에 망설을하다니···”“전하의 잘못을 신하된 도리로서 간했다 하여 어찌 망설이라 하시옵니까? 신은 다만 전하
미륵암 (고산동 647번지)최초 건립 년도는 알 수 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조선 세조때 어느 농부가 밭을 갈다가 현존하는 미륵불상을 얻었다고 하며, 이 사실을 알게 된 세조는 국상 신숙주에게 절을 짓게 하였고, 신숙주가 다시 혜암대사를 후원하여 이 절을 짓고 미륵암이라 하였다고 한다.이런 사실을 통해 유추하면 세조의 재위년간(1455~1468) 중 1460년대를 이절의 초창 연대로 보고 있다.고종 28년 운송화상이 중수한 후 몇차례 보수를 거쳐 오다가 지금의 주지가 법당을 중건하고, 진입로를 말끔히 포장하였다.경내에는 법당, 산신각,요사 등 목조건물이 있으며, 의정부 교도소앞 정자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신숙주 묘 (고산동 산 53-7번지)의정부시 고산동 구성 말에는 신숙주의 묘가 있다.무송군 부인 윤씨의 묘와 나란히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그 중 한글창제사적비는 최근에 건립한 것이다.신숙주는 조선초기의 학자이며 정치가로서 자는 범옹, 호는 보한재, 회현당이고 공조참판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 때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 여섯 임금을 충성으로 보필하였고, 특히 계유정란 이후부터는 조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업적을 남겼다.그의 저서로는 성종의 특명으로 간행된 보한재집 17권을 비롯하여, 세조 6년 여진정벌을 마치고 북정에 관한 것을 펴난한 북정록 6권, 세종 25년 일본 서장관으로 갔을 때의 견문록인 해동제국가 1권과 그밖에 동국정운, 사성통고, 오례의, 경국대전 등이 있다.특히 신숙주는 집현전 학사로 있을 대 한글창제에도 남다른 공을 세웠다.
선조들의 유례신용개의 풍류신용개는 보한재 신숙주의 손자이다.성조 14년(1438)에 진사하고 1488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로 있다가 곧이어 홍문관 정자및 수찬이 된다.글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성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연산군 재위시 무오사화때 투옥당하지만 곧 석방된 후 도승지에 기용되지만 성품이 강직하고 웃사람에 아부치 아니하므로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또다시 전라남도 영광으로 유배당한다. 중종 반정이 있자 신용개는 조정으로부터 환조령을 받고 형조참판에 오른다.신용개는 문장가로서 성품이 호탕하고 술을 좋아했는데 심지어 집안에 늙은 종을 불러 앉혀 놓고 술을 마셨다 하니 그의 성품을 가히 짐작할만하다.신용개는 국화를 무척 좋아했다. 그는 분재 국화를 길렀는데, 언제나 화분 여덝개에 국화를 재배했다고 한다
선인들의 일화여말삼현의정부 송산동에는 삼귀라 불리우는 마을이 있다. 고려가 망하자 조견, 원선, 정구 등 3인은 조선조의 신하가 될 수 없다하여 이곳 삼귀에서 살았다. 이 세 어진이 함께 들어왔다 하여 삼귀가 됐고, 조견의 호를 따서 송산동이라 부른다.조견은 어려서 승려가 되어 여러 절의 주지를 지내다 30세가 넘어 환속한 후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안렴사가 되어 왕명을 받고 지방행정을 감사한다.안렴사의 자격으로 영남지방에 내려갔다가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공양왕이 원주로 쫓겨나고 국새가 이성계 손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한다.조견은 대성통곡하면서 두류산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평생을 지내려 작정한다.그러던 어느날 이태조가 전갈을 보내 큰 벼슬을 줄터이니 조정에 들어오라고 하나, 조견은 단호히 거절했다.하루는 이성계가 형 조�
* 의순공주와 정주당금오동 천보산에는 일명 족두리 산소와 정주당터가 있다. 정주당은 의순공주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의순공주는 조선 효종 원년(1650) 청나라 구왕이 조선에 청혼을 해오자 조정에서는 민간인 여자를 보내려고 하나 훗날이 두려워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청나라는 우리와 혼인을 맺음으로써 선린을 굳게 한다는 미명아래 종실의 미녀들을 무수히 요구해 왔다.)이때 종실인 금린군 이개윤이 자기 딸을 보낼 것을 자청하고 나서자, 조정에서는 그녀를 의순공자라 칭하고 사신과 함께 보냈는데 청나라로 가는 도중 평안도 정주에 다다르자 ‘짐승보다 못한 오랑캐 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가마를 멈추고 볼일이 있다고 속인 다음 가파른 벼랑아래 푸른 물에 �
동의유례 - 녹양동* 녹양평 이라는 군마사육장이 있던 곳 녹양동..조선시대 우리 의정부 일대에 녹양평 이라는 군마 사육장이 있어서 따온 이름이다. 북으로는 양주군 주내면이 접하고 있으며, 공설운동장, 실내체육관, 사이클 경기장 등이 있다.버들개 : 마을 어귀에 고개가 하나 있는데, 버드나무가 무성한 고개라 하여 버들개로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할 때 유현이 됐다.비성거리 : 양주군 주내면 남방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의정부시의 최북단 마을이다.옛날 양주목사가 순행 다니던 길목으로 역대 목사들의 송덕비가 많이 세워져 있다하여 비석거리라 하였는데, 지금은 변음되어 비성거리가 됐다.하동촌 : 천보산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중랑천 상류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하동촌이 됐다.출처 의정부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동의유례 - 자금동, 가능동* 자금동자일동과 금오동의 2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으며 자금동은 자일, 금오의 머리글자를 딴 행정동 명칭이다.북으로는 포천군 소흘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으로는 부용천이 서쪽으로 흘러 중랑천에 합류한다.뒷쪽으로는 천보산이 감싸고 있다. 최근 택지 개발이 이뤄지고 있으며 경기도 제2청사가 들어설 예정이다.귀락마을 : 포천군, 소흘면과 경계를 이루며, 우리 시의 최북단 마을이다. 조선시대 평안도 도사를 지냈던 한 사람이 산수가 아름다운 “이곳에 돌아와 여생을 즐겁게 지낸다”하여 마을이름을 귀락으로 지었다고 한다.금오동 : 포천행 국도를 끼고 있는 상금오, 중금오, 하금오를 일컬어 금오동이라 한다. 조선 선조의 일곱째 왕자 인성군이 이곳에 낙향하여 삶의 터전으로 삼앗는데 그 후손들이 대를이어 번창했다고 한�
동의유례-송산동* 조견, 원선, 정구 등 세분의 충신이 살았던 곳.. 송산동송산동은 행정동으로서 용현동, 민락동, 낙양동, 고산동, 산곡동 5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국한 후 조견은 왕조의 부름을 여러 번 받았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 하여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서 살았다. 조견의 호는 송산인데, 조송산 선생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송산동이 됐다.송산동은 남으로 남양주시 별내면과 북으로는 포천시 소흘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지역으로(최근에는 민락동을 중심으로 택지개발이 이뤄지고 있어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어 도농 복합도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논밭 농사외에도 낙농과 과수재배가 성행하고 있다. 특히 송산배는 의정부의 대표적인 특산물이다.어룡 :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부용천 물�